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묜 부됸니 (문단 편집) === 전간기 === [[파일:external/img.beta.rian.ru/105892663.jpg]] 1938년 병영에서. 내전이 끝나자 부됸니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을 시작으로 여러 군관구들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기병 전문가답게 그는 기병에 관련된 여러가지 장비나 말의 종자 개선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1924년부터는 기병총감을 맡아서 전반적인 기병을 감독하였다. 이렇게 기병에 큰 공을 들이는건 좋았는데, 문제는 기병이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붉은 군대에는 기병 대신 기갑부대가 전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기계화를 추진한 선견적인 이론가들이 많았지만 부됸니는 이를 크게 반대해 수시로 제동을 걸었고 결국 소련군 현대화의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실책만 있던건 아니다. 기병 전문가답게 부됸니는 말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소련의 말 개체수를 늘리고 훈련시킨 것도 부됸니의 공로다. 스탈린의 중공업 계획이 진행되자 소련의 말은 그 수가 반이나 줄었으나 부됸니는 직접 예산을 얻어 해외의 종마를 구입해 훈련시켜 군마를 보충했다. 말좀 늘린게 대단하게 보이진 않을 수 있으나 2차 대전 당시에는 보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이 말이었다. 특히 소련군은 종전까지도 대다수의 보급을 군마에 의존했는데 그 군마들을 키워낸게 부됸니였으니 공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1934년 2월, 전연방공산당 1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5년 붉은 군대에 다시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부됸니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블류헤르]]와 함께 소련 원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투하쳅스키와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1937~1938년의 [[대숙청]] 기간 중 처형되었고,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만이 살아남았다.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 1935년 11월 11일 촬영. 사실 부됸니도 대숙청을 총지휘했던 [[KGB|NKVD]] 부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마수에 걸려 숙청 대상에 올랐지만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부됸니는 권총을 빼들어 체키스트들에게 더 이상 다가오면 다 쏴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